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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일상

서리가 내린 설날

by 막둥씨 2015. 2. 19.

서리.

설이다. 고향에 내려왔더니 설날 아침에 서리가 내렸다. 며칠 봄처럼 따뜻했는데 오늘은 눈같은 서리가 내렸다. 나는 가족들에게 서울에는 서리가 내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말 올겨울에 서리를 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가족들이 말한다. "서울이라고 서리가 내리지 않겠나. 못봤을 뿐이지. 차가 있었다면 앞유리의 서리를 자주 느꼈을껄." 듣고 보니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서울에 살다 보니 시골에 있는것 보다 분명 계절의 변화라던가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에 무뎌지는 것 같다. 메말라가는 감정도 한 몫을 했겠고 무지막지하게 많은 사람이 살고 그들에게 치인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작은 변화도 크게 느껴지는 게 시골생활이라면, 큰 변화도 무뎌지는게 복잡한 도시생활인것 같기도 하다.

고향 친구.

형이 올해는 어디 안가냐고 한다. 오년 여 전만 해도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모여든 어릴적 친구들을 만나러 가곤 했기 때문이다. 동네 간 거리가 다소 있기에 면허를 딴 후부터는 종종 형의 차를 빌리곤 했다. 그런데 최근 몇년간은 그런적이 없고 올해부터는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것도 끝이다. 집안 전체가 고향을 떠난 친구들도 많고, 작년 서른을 맞이해 결혼을 한 친구들이 많아 이제 고향에 전보다 오래 머물수도 없고 때론 오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본인의 가정을 꾸렸다는 건 두 집안의 만남이기 때문에 챙겨야 할 식구들도 늘고 해야 할 일도 늘었을 테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들이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비교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만나기 힘든 친구.

그렇다고 사실 만날 친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도 만나기 힘든 친구들도 있다. 스무살을 넘고 나이가 더 들수록  더욱 만나기 힘들어 지는 친구들이 있다. 사는 세계가 다르고 정치적 성향이 다르고 삶에 대한 관점 자체가 다른 친구들. 어색함을 넘어 공감조차 할 수 없다면, 그 공감을 자아낼 말 조차 꺼낼 수 없다면 어찌 만날 수 있겠는가. 내가 별종일수도 있겠지만, 그저 각기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는 경상도 사람의 특수성도 포함하는데, 정치적 성향과 폐쇄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스무살에 해야 할 고민이지만, 아니, 스무살에도 했던 고민이지만 그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아마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평생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배설.

설날 아침 화장실 변기가 막혀서 난리가 났었다. 비닐을 씌워 눌러도 보고 하수구 뚫는 스프링같은 쇠줄도 넣어보는 등 온갖 방법을 다 쓰다 결국 뚫어뻥을 사러 가기로 한다. 설 당일 대체 어디서 욕실용품을 살 수 있을까? 가장 가까운 대형 마트는 닫았지만, 어느정도 규모있는 동네 마트는 전화를 해보니 영업을 한단다. 가보니 뚫어뻥이 세개가 남아 있어 하나를 들고 왔다. 성능이 좋아보이지 않은 제품이었지만 꽤나 빨리 뚤렸다. 여기서 신기한 건 범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밤손님이 다녀갔나?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리고 물론 나는 아니다.

정체

그런데 정체된 게 변기물만이 아닌듯하다. 간만에 후다닥 싸지르는 글을 쓰다 보니 깨닫는다. 나는 지난 수년간 정체되어 있었구나 하고. 내 사상과 삶의 철학에 발전이 없었다. 수년전 얻은 것을 되풀이만 하다 보니 그간 내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는데 몰두했던것 같다. 최근 겪었던 수많은 마찰음의 원인인 것 같기도 하다. 원인을 찾으라면 밥벌이의 무게일지도 모르겠고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그리고 깊게 나아가야 한다고 새해나 인간 관계의 변화 등 계기가 생길때마다 다짐하지만, 실천은 참으로 쉬운게 아닌것 같다. 그나마 이렇게 배설이라도 하니 더 자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나 보다. 더 많이 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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