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을 처음 방문한 것은 올해 초였다. 근처에서 십여 년을 살았지만, 그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이다. 서울 사람들은 남산타워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처음 접한 창덕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1926년 대조전에서 승하하는 날까지 기거하시던 곳인지라, 이제 까지 보아 온 그 어떤 궁과도 달랐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간 보았던 궁들은 텅 빈 곳간 같은 건물들만이 있었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도, 밥을 해먹는 공간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에 비해 창덕궁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현대 문물이 들어온 흔적이 보여 때론 이질적이기 까지 했다.
몇 가지 들자면 이렇다. 우선 천정에 전등이 달려 있었으며, 고급 호텔의 로비 앞에서나 볼 수 있는 비를 맞지 않고 자동차에 탑승하는 장소가 있었고, 현대식 주방이 있었으며, 침실에는 침대가 있고 응접실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분명 현대적인 시설에서 받은 이질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 분명 새로웠다.
후원은 운이 좋았던지 현장에서 표를 구할 수 있어 예정에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전번에 창덕궁을 찾았을 때는, 후원 관람의 모든 시간대가 매진이었던 터라 창덕궁만 보고 발길을 돌렸어야 했었다.후원에는 금원, 비원 등 다른 이름이 많다. 먼저 후원(後苑)은 궁궐 뒤편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금원(禁苑)은 왕족 이외에 들어갈 수 없는 금지구역이라는 의미다. 근래 들어 논란이 일고 있는 건 비원(秘苑)이라는 이름이다. 비원(秘苑)은 1903년 대한제국 당시 창덕궁 후원의 관장 부서의 이름 비원(秘院)에서 온 것인데, 순종실록 권3 융희 2년(1908) 4월 17조에 보면 순종이 비원(秘苑)에 나가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일제가 후원을 깎아내리기 위해 비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창덕궁 담길을 따라 후원으로 들어서니, 그저 궁 뒤의 작은 정원이라 여겼던 것과 달리 후원의 규모는 엄청났다. 면적은 10만 평이 넘었고, 해설사를 동반한 관람을 하는 데만 1시간 30분이 소요됐다. 내부에는 임금의 저서를 보관했던 규장각을 비롯해, 궁에서 대부분의 생을 보내야 했던 왕의 자취가 여기저기 묻어났다.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왕의 궁 밖 행차는 크게 3단계로 구분이 되는데, 가장 간편한 단계의 행차에도 수행 인원이 1000명이 따랐다고 한다. 이는 백성들에게도 ‘민폐’일 수밖에 없는지라 결국 왕은 궁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뉴욕에 센트럴 파크가 없었다면 그만큼의 정신병원이 필요했을 것이다”는 말처럼, 궁에 갇혀 지내야 하는 왕에게 후원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에 틀림없다.왕의 일생을 생각하며 천천히 나머지 후원을 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바깥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왕을 위한 치유의 공간 후원이, 이제는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치유를 받기 위해 예약을 하고 찾고 있는 이 현시대에 아이러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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