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옛집에서 큰 감흥을 얻은 나에게 한 지인은 이태준 고택을 소개해 주었고 그 바로 다음날 시간적 여유가 있어 나는 눈부신 햇살과 더불어 부푼 기대감을 안고 상허 이태준 고택을 찾았다. 전반적으로 아담하고 알찬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으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개인이 찻집으로 운영하는 공간이라 최순우 옛집에 비해서는 다소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여서 아쉬웠다. 이른 아침에 공복이라 차는 마시지 못했다. 다음에 지인과 함께 차한 잔 해야 겠다. 찻집으로서는 가히 수준급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허 이태준 고택은?
상허 이태준고택은 월북 작가 이태준이 1933년에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단편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피는 정원>, 장편 <황진이>, <왕자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한 곳이었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21년 휘문고보를 나왔으며, 1927년 11월 일본 조치(上智)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33년 박태윤ㆍ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조직하고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선구자이며, 1946년 6월경 월북하였다가 1953년 임화ㆍ김남천 등과 함께 숙청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옥은 '성북동 이태현가옥(城北洞 李太賢家屋)'으로 지정되었던 것을, 대한민국 정부가 이태준을 포함한 납·월북 작가들을 1988년 해금 조치함에 따라, 이태준 후손들의 명칭 변경 요구에 의해 1998년 7월 10일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성북동길을 따라가다가 성북2동사무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서 주차장 바로 오른쪽에 있다.
당시 서울 교외에 세워진 규모가 작은 별장형의 가옥으로, 앞에 작은 내를 두고 뒤에 동산을 낀 터에 서남향으로 자리잡았다.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세운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건물은 대지의 동북쪽에 있다. 서남쪽으로는 우리나라 농촌의 정경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이 가꾸어져 있고, 감나무·사철나무가 있다. 원래 이 가옥 서남쪽에 행랑채 '상심루(賞心樓)'가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전통찻집 '수연산방'이 들어서 있다.
이 가옥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서울·경기지방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ㄱ'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 그 뒤쪽 전체에 실(室)이 추가되어 '工'자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조선 말기 전통 한옥이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규모를 확장하며 변형된 예를 보여준다. 이 가옥의 전면부는 정면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인 왼편으로는 건넌방, 오른편으로는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곳에 누마루가 조성되었다. 이 누에는 '閒香樓(한향루)'라 새긴 부채 모양의 나무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과 건넌방 앞에는 툇간이 있으며, 건넌방 앞 퇴 바닥은 약 10cm 정도 높였고, '아(亞)'자 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후면부를 보면, 건넌방 뒤에는 뒷방이, 대청 뒤에는 쪽마루가, 안방 뒤에는 부엌ㆍ찬마루ㆍ화장실이 각각 자리잡고 있는데, 대청 뒤의 쪽마루는 뒷방과 부엌ㆍ화장실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대청 전면 처마 아래 왼쪽 칸에는 '壽硯山房(수연산방)', 오른쪽 칸에는 '竹澗書屋(죽간서옥)' 현판이 걸려있다. 기단은 지대석을 돌리고 축부(軸部)는 심벽(心壁)이며 외부 창은 모두 유리를 달았다. 주춧돌은 긴 육면체로 되었으며 기둥은 17cm 각으로 약한 흘림을 하였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1고주 5량가로 결구되었다. 안방 남쪽의 누마루 세 면 주위에는 '아(亞)'자 문양의 난간을 두르고, 난간동자와 법수(法首), 두겁대와 이를 받친 하엽동자(荷葉童子) 등이 갖추어졌다. 건넌방 앞에 있는 들마루에도 '아(亞)'자 문양의 난간이 있고, 그 밑으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으며, 아궁이 앞에는 널판을 조각하여 달았다. 안방ㆍ건넌방 그리고 뒷방 바깥에는 처마 밑의 벽을 내쌓아서 벽장을 만들었다.
안채 앞마당에는 마당보다 지면을 낮추어 우물을 설치하였고, 석상과 팔각석주 등이 있는 정원이 꾸며졌으며, 안채 뒤 서북쪽으로는 막돌 허튼층쌓기를 한 화계(花階)가 조성되었다. 이 가옥은 이러한 시설물과 외부공간 구성으로 전통가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기단은 다듬은 장대석으로 두벌대 바른층쌓기를 하였으며, 그 위에 네모뿔대의 주춧돌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17cm×17cm 크기로 약한 흘림을 가지며 모를 접었다. 도리는 12cm × 12cm 크기의 납도리를 사용하였으며, 모를 접었는데 소로받침은 없다. 처마도리와 중도리는 사괴맞춤을 하였고, 종도리는 장혀를 덧붙이고 헛창방을 보내서 그 사이에 소로를 끼웠다. 대청이 있는 몸채의 가구(架構)는 1고주 5량인데, 전면 고주와 평주 위에 툇보를, 고주와 후면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고주머리와 대들보 안쪽에 세운 동자기둥에 종량을 걸었다. 종량 중앙에 판대공을 놓아 굴도리로 된 종도리를 받쳤는데, 종도리 밑은 장혀ㆍ소로로 받쳤으며, 이 소로를 다시 뜬창방이 받고 있다.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몸채에서 꺾여 나온 날개채의 가구는 맞거리 3량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막새기와를 쓰지 않았고, 건물 전면부는 팔작지붕이고 후면부는 맞배지붕이다.
이 가옥은 별장형 주택의 작은 집이면서도 모든 것이 알차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일각대문과 우물가 정원이 집터 주위의 수목과 잘 어울리고, 지붕과 처마, 미닫이문 창살도 한옥의 예스러운 멋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사랑채 없이 사랑방의 기능을 가진 실(室)인 누마루를 안채에 집약시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평면을 해결한 점, 안채에 필요한 실을 뒤로 확장시켜 '工'자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구성한 점, 부엌을 안방 뒤로 위치시킨 점, 화장실을 안채에 부속시킨 점 등에서 조선 말기를 지나면서 전통한옥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이태준의 수필 <무서록>, <목수들>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터의 내력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가옥은 그가 이 수필에서 한옥의 맛과 구식 목수들의 인품을 칭송하였듯이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 건축의 순박ㆍ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중략)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고 한 그 바램이 나타나는 집이다. - 서울시청 홈페이지 소개자료 -
이 가옥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서울·경기지방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ㄱ'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 그 뒤쪽 전체에 실(室)이 추가되어 '工'자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조선 말기 전통 한옥이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규모를 확장하며 변형된 예를 보여준다. 이 가옥의 전면부는 정면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인 왼편으로는 건넌방, 오른편으로는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곳에 누마루가 조성되었다. 이 누에는 '閒香樓(한향루)'라 새긴 부채 모양의 나무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과 건넌방 앞에는 툇간이 있으며, 건넌방 앞 퇴 바닥은 약 10cm 정도 높였고, '아(亞)'자 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후면부를 보면, 건넌방 뒤에는 뒷방이, 대청 뒤에는 쪽마루가, 안방 뒤에는 부엌ㆍ찬마루ㆍ화장실이 각각 자리잡고 있는데, 대청 뒤의 쪽마루는 뒷방과 부엌ㆍ화장실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대청 전면 처마 아래 왼쪽 칸에는 '壽硯山房(수연산방)', 오른쪽 칸에는 '竹澗書屋(죽간서옥)' 현판이 걸려있다. 기단은 지대석을 돌리고 축부(軸部)는 심벽(心壁)이며 외부 창은 모두 유리를 달았다. 주춧돌은 긴 육면체로 되었으며 기둥은 17cm 각으로 약한 흘림을 하였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1고주 5량가로 결구되었다. 안방 남쪽의 누마루 세 면 주위에는 '아(亞)'자 문양의 난간을 두르고, 난간동자와 법수(法首), 두겁대와 이를 받친 하엽동자(荷葉童子) 등이 갖추어졌다. 건넌방 앞에 있는 들마루에도 '아(亞)'자 문양의 난간이 있고, 그 밑으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으며, 아궁이 앞에는 널판을 조각하여 달았다. 안방ㆍ건넌방 그리고 뒷방 바깥에는 처마 밑의 벽을 내쌓아서 벽장을 만들었다.
안채 앞마당에는 마당보다 지면을 낮추어 우물을 설치하였고, 석상과 팔각석주 등이 있는 정원이 꾸며졌으며, 안채 뒤 서북쪽으로는 막돌 허튼층쌓기를 한 화계(花階)가 조성되었다. 이 가옥은 이러한 시설물과 외부공간 구성으로 전통가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기단은 다듬은 장대석으로 두벌대 바른층쌓기를 하였으며, 그 위에 네모뿔대의 주춧돌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17cm×17cm 크기로 약한 흘림을 가지며 모를 접었다. 도리는 12cm × 12cm 크기의 납도리를 사용하였으며, 모를 접었는데 소로받침은 없다. 처마도리와 중도리는 사괴맞춤을 하였고, 종도리는 장혀를 덧붙이고 헛창방을 보내서 그 사이에 소로를 끼웠다. 대청이 있는 몸채의 가구(架構)는 1고주 5량인데, 전면 고주와 평주 위에 툇보를, 고주와 후면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고주머리와 대들보 안쪽에 세운 동자기둥에 종량을 걸었다. 종량 중앙에 판대공을 놓아 굴도리로 된 종도리를 받쳤는데, 종도리 밑은 장혀ㆍ소로로 받쳤으며, 이 소로를 다시 뜬창방이 받고 있다.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몸채에서 꺾여 나온 날개채의 가구는 맞거리 3량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막새기와를 쓰지 않았고, 건물 전면부는 팔작지붕이고 후면부는 맞배지붕이다.
이 가옥은 별장형 주택의 작은 집이면서도 모든 것이 알차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일각대문과 우물가 정원이 집터 주위의 수목과 잘 어울리고, 지붕과 처마, 미닫이문 창살도 한옥의 예스러운 멋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사랑채 없이 사랑방의 기능을 가진 실(室)인 누마루를 안채에 집약시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평면을 해결한 점, 안채에 필요한 실을 뒤로 확장시켜 '工'자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구성한 점, 부엌을 안방 뒤로 위치시킨 점, 화장실을 안채에 부속시킨 점 등에서 조선 말기를 지나면서 전통한옥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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