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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잡설

떨어지고 해진 속옷을 버리며

by 막둥씨 2014. 3. 6.

Photo(cc) via 제동환 / flickr.com

속옷이 가관이다. 너덜너덜한 건 기본이고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다. 이 상태가 된지도 벌써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 견뎌왔다. 평소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한 수도승의 책이다.

 

 

<프랑스 수도원의 고행>은 향적 스님의 프랑스 카톨릭 수도원의 체험기다. 스님과 카톨릭 수도원이라니. 꽤나 흥미진진한 조합이 아닌가? 그렇다고 거부감 들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면 카톨릭과 불교는 개신교와 달리 타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군대 있을 적 주말 종교 참석 시간에 나는 절에 다니다가 성당으로 갈아탄 적이 있었다. 나의 군 동기는 교회(개신교)에서 성당으로 갈아탄 친구였다. 종교의 역사나 맥락을 보자면 내가 더욱 몰매 맞을 변절자(?)였지만, 성당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내 친구를 보고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성당이나 절 사이를 오가는 사람은 많지만... 교회(개신교)에서 온 사람은 거의 없어요!”

 

아무튼, 향적 스님의 경험은 꽤나 흥미진진했다. 실제 에피소드는 20년도 훨씬 전인 1989년~90년대의 것이었어도 말이다. 그 중 내가 너덜너덜한 속옷을 입고 있는 이유는 향적 스님이 수도원 수사들의 청빈함에 크게 놀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수도원의 방 자체도 세면기와 책상, 스탠드, 침대가 전부인 것(심지어 침대는 사과상자 두 개에 베니어판을 올려놓은 것)도 그랬지만, 수사들은 양말은 물론 떨어지고 해져 찢어진 속옷까지 몇 번이고 천을 덧대며 기워서 입었던 것이다. 아마 한국에선 걸레로도 활용하지 않을 정도로 누더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향적 스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국의 수도승들은 양말도 잘 안 기워 입는 것에 비하니 크게 부끄러웠다고 한다.

나도 읽다보니 생각이 들었다. 떨어지고 해져 구멍이 나더라도 사실 기능에는 크게 이상이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양말은 눈에 보이지만, 속옷은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날부터 속옷이 해지고 구멍이 났다고 해서 나도 쉬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는 수사도 수도승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치를 소비에서 찾지 않는다면, 이런 종류의 실천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약간은 불편함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수사와 수도승이 찾고 있는 어떤 진리나 깨달음의 경지일까? 분명 그런 것들은 아니지만(힘들지만), 어느 정도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는 있을 듯하다. 뭐, 게다가 일찍이 많은 덕망 높은 선생들이 “버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나 “무소유”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관심 없을 나의 누더기 속옷에 대한 포장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아직 더 입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든다. 허리의 고무 밴드도 늘어날 대로 늘어났다. 방금 새로운 속옷을 주문했다. 개당 4000~5000원 가량이다. 부디 튼튼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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